무고의 지

 「안녕. 나는 벼랑에서 울타리와 싸워서 이겼지. 무엇도 나의 적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싸움을 걸었지.
      그렇게 이긴 다음에는 나를 그대로 수라에 처박았단다. 거기서 진흙을 먹고 벌레와 함께 기어다니곤 했어.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딱 맞는 죽음을 소유할 수 있냔 말이야. 어떻게 창피를 당했을 때 바로 구멍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 나는 나를 위해 구멍을 팠었어. 그 이름을 무저갱이라 짓고 무저갱과 인사를 했어.
      그런데 어느 날 무저갱은 나를 그만 막아섰단다. 우리가 너무나 친하기 때문에 또 자기가 너무나 정직하기
      때문에 내가 쥐처럼 기어다니는 걸 못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나는 수라에서도 직립해서 걷게 되었어.
      거기선 아무도 반역을 하지 않는데 나만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다녔지. 눈초리를 잔뜩 받아먹었단다.
      
      그 다음에 너랑 친구 하고 나서는, 잠을 많이 못 잤지. 분명히 우리는 진리에 정신이 팔려서 이리저리
      휘둘려 다닌 셈이다. 너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주기는 했지만. 우리는 꿈속에서 보았잖아. 꿈속에서라면
      누구든 그렇게 순진하고 무구할 거야. 물론 너를, 나도 조금은 기다렸단다. 나는 세상에 선의가 있는지 궁금해.
      누군가 욕실에 물을 받아놓고 한 시간이나 나오지 않으면, 혹시 고개를 떨군 채 다시 들지 않기로 마음먹었을까
      걱정이 되어 달려오는 선의가 나를 위해서도 존재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언젠가 도망치려던 때에, 아무개한테
      세상에 그런 선의가 있냐고 물었었지. 그런데 아무개는 그런 선의가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르다고 하더라고.
      나는 선의에 대해 생각하길 그만뒀어. 대신 고통에 대해 계속 헛소리를 했지. 누구도 고통을 알면서 악행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이제 됐다. 실은 악행이라는 것 자체가 헛소리가 아니냔 말이야.
      
      나는 너무 오래 살았어. 나는 열아홉 살이지만, 내가 조금 더 어리광을 부려야 했었단 생각을 한단다.
      그러니 이제 그만 투쟁했으면 좋겠어. 남은 건 만분의 일이라는 혁파 혹은 만분의 구만구천구백구십구라는
      후퇴거든. 승리는 없어. 이겨서 끝낼 수 있었다면 이미 졌을 때 끝났을 테니까. 우리 싸움을 그만두자……
      악수를 하자…… 그리고 나에게 제대로 된 자유를 줘. 그러나 저쪽이 그만두지 않기 때문에 계속 싸우는 거야.
      다들 내가 치세에 칼을 휘두른다고 욕하지만, 별 것 아닌 투정이란다. 어쨌건 나는 계속 싸우면서 계속
      도망치고 싶거든. 그런 때에 선의가 나를 도망치게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단 한 번이라도 구원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작은 미련이 생겨서, 서러운 날만이 종종 생길 뿐. 너는, 나를 구하러 올 생각이 없잖아.
      나를 애정해주겠지만 구원하진 않을 거잖아. 그러면 됐다. 너와는 사랑만 하는 거지. 사랑만 할 거라면
      우린 영원히 보지 않아도 되고, 그러므로 나는 이 편지를 쓴다. 너는 부디 오래 사랑하거라. 나는 홀로
      방황할 테니. 밤중에 내린 눈을 담아 마지막으로 보내주겠다. 녹아도 좋으니 가지고 있어라.
      그럼 영원에서 보자!」